맨위로가기

이명직 (목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명직은 대한민국의 목사이자 성결교회의 지도자이다. 그는 황성기독청년회에서 공부하며 개신교 사상을 접하고 일본 유학을 거쳐 동경성서학원에서 세례를 받았다. 1914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조선성결교회 총회장을 역임하며 교단 행정을 이끌었고,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성서학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또한, 교단 기관지 《활천》 주간을 맡아 성결신학을 체계화하는 등 성결교단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시기 신사참배에 협조하고 친일 행적을 보였으며, 이로 인해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서울신학대학교 - 찰스 카우만
    찰스 카우만은 미국의 선교사로, 나카다 주지, 어니스트 길보른과 함께 동양선교회를 설립하고 일본 전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헌신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카우만 기념 성서학원이 설립되었다.
  •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 설수진
    1996년 미스코리아 선 출신 설수진은 배우 및 방송인으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베스티안재단 대표를 맡고 있다.
  •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 이기웅 (독립운동가)
    이기웅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로, 사후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이명직 (목사)
기본 정보
이명직 목사
이명직 목사
본명이명직 (李明稙)
로마자 표기I Myeongjik
출생1890년 3월 23일
사망1973년 7월 17일
국적대한민국
학력
학력경성성서학원 졸업
경력
주요 경력성결교회 목사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2. 생애

이명직은 한성부 출신으로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슬하에서 성장했다.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공부하며 월남 이상재 등에게 영향을 받아 개신교에 입문했다. 일본 유학 후 1911년 귀국하여 전도사로 활동하다 1914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3년 조선성결교회 초대 총회장을 시작으로 네 차례 총회장을 역임했다.

경성성서학원, 경성신학교, 서울신학교 등에서 교장 및 교수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고, 1922년부터 교단 기관지 《활천》 주간을 맡아 성결교 신학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기간 신사참배 강요에 협조하고, 일본의 조선 합병을 정당화하는 등의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43년에는 성결교단 해산 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이명직은 대한민국 성결교회에서 '성결의 아버지', '성결교회의 사부' 등으로 불리며 존경받는 인물이다.

2. 1. 유년 시절과 신앙 입문

한성부 출신으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주전원 전무과 주사로 근무하던 숙부 이승태(李承泰)에게서 자랐다.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 Y.M.C.A.)에서 공부하며 집안 문중의 할아버지뻘 월남 이상재와 같은 항렬의 성우 이명직과 교류하였다. 월남 이상재에게서는 개신교 사상을, 이명직에게서는 해외 유학의 필요성을 느껴 일본 유학을 결심, 정치와 법학을 배우려 했다. 그러나 1909년 일본 동경의 조선 YMCA 김정식 총무의 안내로 동경성서학원에 입학, 얼마 후 나카다 주지 감독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명직의 집안은 전형적인 유교 가문이었으나, 월남 이상재와 같은 선각자의 영향으로 청년 시절 자발적으로 개신교에 입문하게 되었다.[2]

2. 2. 목회 활동과 신학 연구

한성부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통해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1911년 귀국하여 전도사로 활동했다. 1914년 4월 21일 제5회 성결교역자 총회에서 성결교회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2] 1933년 조선성결교회 총회가 조직되면서 초대와 이듬해 제2회, 1938년과 1939년 제6회, 제7회 등 네 차례에 걸쳐 총회장을 역임했다.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성서학원 교수(1916년)와 원장(1935년), 경성신학교 교장(1940년), 서울신학교 교장(1951년), 서울신학대학 초대학장(1959년), 성결교신학교 명예교장(1962년)을 역임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1965년 서울신학대학 명예학장에 추대되었다. 1922년부터 교단 기관지인 《활천》 주간을 맡았으며, 성결신학의 핵심인 사중복음과 성결론을 체계화하고 많은 저술을 남겨 성결교단의 신학적 토대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2]

2. 3. 친일 행적과 논란

이명직은 태평양 전쟁 기간 신사참배 강요에 협조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그는 마태복음의 포도원 비유를 들어 일본의 조선 합병을 정당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 1940년에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이상(大理想)〉이라는 글을 통해 일본 건국이념인 팔굉일우가 성서의 가르침과 부합한다는 주장을 펼쳤다.[2]

1938년 개신교 각 교단 대표들이 신사참배를 할 때 성결교 대표로 참여하여 감리교의 양주삼, 장로교홍택기 등과 함께 일본 신사를 방문해 참배했다. 1943년 일제의 강압으로 성결교단이 해산될 때, 성결교 지도자 7인과 함께 성결교회 해체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성서가 유대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일본의 국체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종교 부문에 이명직이 포함되었다. 2005년 예비 명단 공개 당시 성결교단에서는 이명직과 박현명 두 사람이 선정되어 신사참배 및 친일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이에 대해 교단 측은 이명직의 "신중심적 국가관"을 이유로 들거나, "하나님만 아시는 심적 고통"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또는 교단을 이끌다 보니 신사참배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동정론 등을 제시하기도 했다.

2. 4. 사망 이후

이명직은 '성결의 아버지', '성결교회의 사부'로 불릴 만큼 대한민국 성결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며 존경받고 있다. '성결교회의 사도 바울'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3]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종교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2005년 예비 명단이 공개되었을 때 개신교 인물 47명 중 성결교단에서는 이명직과 박현명 두 사람이 선정되어 오랫동안 잠복해 있던 신사참배 및 친일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이에 대해 교단 측은 국가보다 신을 중심으로 삼는 이명직의 "신중심적 국가관"을 이유로 들거나 그의 내면에 "하나님만 아시는 심적 고통"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교단을 이끌다 보니 신사참배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동정론 등을 내놓은 적이 있다.

3. 신학 사상

이명직은 1922년부터 교단 기관지인 《활천》 주간을 맡았으며, 성결교 신학의 핵심인 사중복음과 성결론을 체계화하고 많은 저술을 남겨 성결교단의 신학적 토대를 놓았다는 평을 듣는다.[2]

4. 평가

이명직은 '성결의 아버지', '성결교회의 사부' 또는 '성결교회의 사도 바울'로 불릴 만큼 대한민국 성결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며 존경받고 있다.[3] 1922년부터 교단 기관지인 《활천》 주간을 맡았으며, 성결신학의 핵심인 사중복음과 성결론을 체계화하고 많은 저술을 남겨 성결교단의 신학적 토대를 놓았다는 평을 듣는다.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성서학원 교수(1916년)와 원장(1935년), 경성신학교 교장(1940년), 서울신학교 교장(1951년), 서울신학대학 초대학장(1959년), 성결교신학교 명예교장(1962년)을 역임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65년 서울신학대학 명예학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기간 신사참배 강요에 협조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1938년 개신교 각 교단 대표들이 신사참배를 할 때, 성결교 대표로 감리교의 양주삼, 장로교홍택기 등과 함께 일본 신사를 방문해 신사참배를 했다. 1940년 《활천》에 실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이상(大理想)〉이라는 글에서는 일본 건국이념인 팔굉일우가 성서의 가르침과 부합한다는 논리를 폈다.[2] 1943년에는 성결교단 해산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종교 부문에 포함되었다.

참조

[1] 웹인용 성결교 이명직 목사에 대한 연구 http://blog.daum.net[...] 2016-02-13
[2] 서적 친일논설선집 실천문학사 1987-08
[3] 뉴스 한국 성결교회의 사부(師父) 이명직 목사 http://au.christiant[...] 크리스천투데이 2007-05-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